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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레츠고는 일부사진들이 맨위에 쓸데없이 한번 더 나와서 결과적으로 글 전체에 걸쳐 사진이 2번 반복되어서 나옴. 위에 사진들 무시하시고 아래에서부터 이글의 시작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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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훈 교수가 주장하는 위안부 주요 모집 루트는 부모나 친척 또는 인신매매단 등에 의해 팔려간 케이스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이런 얘기를 하면 꼭 아무리 가난해도 부모나 친척이 자식을 파는게 말이 되냐는 반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당시 기사를 통해 사례를 확인해보고자 한다.
일단 사전에 알아야 할 것은 일제는 공창제를 시행하던 시대였다.
창기가 되려는 여자들은 부모나 친척의 동의를 얻은 뒤 경찰에 허가를 받아야만 포주들 밑에서 매춘업을 할 수 있었다.
즉 부모와 친척이 공창제를 활용해 포주에게 딸자식을 팔아먹는 구조가 합법적으로 인정됐다는 것이다.
중요한 점은 공창이 되기 위해서는 성년이 되어야만 했다. 미성년자가 공창이 되는 것은 불법이었으므로,
부모가 미성년자인 딸자식을 매춘업을 시키려고 경찰에 허가증을 내면 경찰이 허가증을 안내주었다.
그래서 이런 일도 있었다.
애비가 17살 먹은 딸을 4년 계약, 320원에 유곽에 팔려고 했는데 미성년자라 허가가 안 날것 같으니
경찰서에다가 나이를 속여서 신고했다가 경찰에 걸려서 처벌 받았다는 웃지 못할 사건이다.
역시나 13살짜리, 14살짜리 미성년이 된 딸을 경찰에 허가를 받지 않고 팔아먹었다가 경찰에 걸렸다는 기사다.
이번엔 질녀... 그러니까 조카딸을 팔아먹기위해 친딸로 호적을 조작해서 팔아먹으려다가 경찰에게 걸린 케이스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를 조금만 검색해보면 알겠지만, 이런 사례는 수도 없이 검색된다.
애비는 일본경찰을 속여서 딸을 팔아먹기위해 호적을 조작하고, 일본 경찰들은 그런 범죄자를 엄히 처벌해온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이런 뉴스들은 범죄를 저지른 뉴스다보니 기사화가 되는거지,
성년이 된 딸을 정상적으로 허가를 받아 팔아먹는 것은 당시에는 당연한 상식이었으므로 기사화조차도 되지 않는거다.
얼마나 비일비재했는지 짐작했을 수가 있다.
역시 위안부 모집의 대표적 사례로 꼽고 있는 취업사기 케이스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수많은 사례가 검색되지만 대표적인 케이스를 꼽아온거다.
일반인들은 일본경찰이 위안부를 강제연행했다고 생각하는데 알고보면 취업사기, 인신매매단을 일본 경찰이 때려잡았음.
다음은 당시 분위기를 전반적으로 알 수 있는 기사니 붉은색 마크 말고 전반적으로 읽어보기 바란다.
일제시대 창기가 무려 8천6백명이며 그들 대부분이 가난 때문에 부모가 팔았다고한다.
요즘같은 세상에 문명이 발달한 선진국들에서 풍족한 삶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은 절대 이해할 수 없지만
그 당시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서 부모가 자식을 팔아먹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던 시대였다는 것이다.
Japanese Prisoner of War Interrogation Report No. 49: 20 Korean Comfort Girls
일본군 전쟁 포로 심문 보고서 제 49호 : 한국인 위안부들
LIVING AND WORKING CONDITIONS
생활과 업무 조건
In Myitkyina the girls were usually quartered in a large two story house (usually a school building) with a separate room for each girl. There each girl lived, slept, and transacted business. In Myitkina their food was prepared by and purchased from the "house master" as they received no regular ration from the Japanese Army. They lived in near-luxury in Burma in comparison to other places. This was especially true of their second year in Burma. They lived well because their food and material was not heavily rationed and they had plenty of money with which to purchase desired articles. They were able to buy cloth, shoes, cigarettes, and cosmetics to supplement the many gifts given to them by soldiers who had received "comfort bags" from home.
미트키나에서 여성들은 대개 큰 2층 가옥(주로 학교 건물이었던)에서 생활했으며 각 여성마다 하나의 독립된 방을 제공받았다. 그 방에서 각각의 여성들은 생활하고, 자고, 비즈니스를 행하였다. 미트키나에서 그들의 음식은 위안소 업자를 통해 제공받아 구매하였으며, 일본군으로부터 식량 배급을 받지는 않았다.
다른 장소들에 비해 버마에서 그들은 호사스러운 수준으로 살았다. 이는 버마에서의 2년째 생활에서 특히 그러하였다. 그들은 (병사들과 달리) 음식과 물품이 심하게 통제되어 배급되는 상황이 아니었으며 가지고 싶은 물건들을 구매할 많은 돈이 있었기 때문에 잘 살았다. 그들은 옷, 신발, 담배, 화장품을 살 수 있었으며 집으로부터 "위안 가방"을 우송받은 병사들로부터 많은 선물을 받았다.
While in Burma they amused themselves by participating in sports events with both officers and men, and attended picnics, entertainments, and social dinners. They had a phonograph and in the towns they were allowed to go shopping.
버마에 있는 동안 그들은 장교들과 다른 남자들과의 운동 경기에 참가하였으며 소풍과 각종 오락, 사교적 저녁 식사 등에 참가하며 스스로를 즐겁게 하였다. 그들은 축음기를 가지고 있었으며 도시에서 쇼핑을 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https://en.wikisource.org/wiki/Japanese_Prisoner_of_War_Interrogation_Report_49
책 (버마 전선의 일본군 위안부 문옥주) 중에서
우리가 사이공에 있었던 그 때가 우기였던것 같다. 왜냐하면 내가 사이공에서 레인코트를 샀던 것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레인코트는 프랑스산으로 아주 산뜻한 녹색이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색이 녹색이라 그 레인코트를 사지 않을수 없었다. 사실 디자인은 특별한 게 없었지만 타는 듯한 녹색이 아주 멋졌다. 그 녹색은 프랑스다운 녹색이었다.
나는 악어가죽 핸드백에 하이힐을 신고 녹색 레인코트를 입은 멋진 차림으로 사이공의 거리를 활보했다. 아마 누가 보더라도 내가 위안부로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그 날의 기억을 떠올리면 아주 그립고 그때의 자신만만함이 되살아나는 기분이 든다.
책 (버마 전선의 일본군 위안부 문옥주) 중에서
랑군 시장에는 보석가게도 있었다. 버마는 보석이 많이 생산되는 곳이었기 때문에 루비나 비취가 특히 싼 편이었다. 친구들 중에는 보석을 많이 모으는 사람도 있었다. 나도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는게 좋을것 같아서 큰 맘먹고 다이아몬드를 사기도 했다.
일본의 활동사진이나 일본에서 온 가부키 공연을 보러 간 적도 있었다. 가부키는 배우들이 의상을 여러개 겹쳐입고 있던 것과 남자배우가 여자 역할을 하는 것이 신기했다.
책 (버마 전선의 일본군 위안부 문옥주) 중에서
내 이름으로 된 저금통장이 만들어졌고 거기에는 틀림없이 오백원 이라고 적혀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한 저금이었다. 고향인 대구에서 어렸을 때부터 아이보기를 하거나 물건을 팔아 그렇게 돈을 벌었어도 어려운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내가 그런 큰 돈을 저금할 수 있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당시 천원이면 대구에서 작은 집 한채를 살 수 있었다. 그 정도 돈이면 어머니가 조금 편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드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쑥스러우면서도 정말 기뻤다. 그때부터 저금통장은 내 보물이 되었다.
책 (버마 전선의 일본군 위안부 문옥주) 중에서
저금해 둔 돈 중에 5000 엔을 송금했다. 담당하는 병사에게 물어보니 "저금이 있다면 전부 보내는 게 좋을 듯" 이라고 했지만 나는 "남은 돈은 조선에 돌아가 전부 출금할 것이니까 괜찮아요" 라고 대답하고 전부 송금하지 않았다. 우선 송금한 돈이 제대로 도착할지가 걱정이었고 겨우 모은 저금이 없어지는 것도 왠지 불안했다.
책 (버마 전선의 일본군 위안부 문옥주) 중에서
어쩌다 모처럼 놀러 왔으면서도 방구석에 아무런 말도 없이 꿇어앉아 있는 병사들도 간혹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상관에게 얻어맞았거나 해서 엄청 속이 상하거나 돈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내가 "술을 살께요" 하고 술을 사서 마시도록 해주었다. 그런일은 곧바로 부대에 소문이 퍼졌던 모양으로 며칠 뒤면 반드시 그 병사의 상관인 사람이 와서 표를 한 두장 여분으로 놓고 돌아가곤 했다. 그럴때면 팁도 쥐어 주었다.
일본군 위안부의 월급으로 온갖 화려한 옷과 보석으로 치장하고 다니고 가부키 공연을 보러 다니기도 하고
친가가 있는 조선으로 무려 집 5채를 살수 있는 돈을 송금하기도 했다는 위안부 문옥주의 증언.
정대협과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묻고 싶다. 이것이 과연 나치의 홀로코스트만큼 세계적으로 경악할만한 가혹한 성학대를 당한 위안부의 모습인가?
게다가 과거와 지금의 증언이 180도 달라지거나 증언의 오류가 많다.
우리나라야 여자의 성폭행 증언 하나로 남자를 감방에도 보내는 나라니까 이게 통할지 모르지만
과연 외국에서 이러한 허위 증언들이 통할 것이라고 생각하나?
오히려 일본의 우파들은 얼씨구 좋다고 더욱 한국측의 주장을 허구로 몰아 세계에 선전할 것인데?
요즘 기자들은 기초적인 2차대전 역사도 제대로 모르고 기사를 쓰나?
그러니까 기레기소리를 듣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한겨레 기레기가 쓴 위안부 이야기
근데 뭐? 지퍼? 지퍼?
당시 일본군의 상하의 군복에는 지퍼가 존재하지 않는다
지퍼에 사용되는 금속 자체가 당시 일본군에 있어서 귀중한 소모자원이었기에 단추를 사용했고
지퍼는 철이 남아도는 미군의 군복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지퍼를 내린 군인에 대한 증언을 한 위안부가 있다면 그 위안부는 일본군 위안부가 아니라 미군의 양공주라고 봐야 한다.
덧붙여서 애시당초 지퍼라는 것 자체가 미국의 BF 굿리치란 회사의 등록상표이고 이것을
일본에서는 1950년 요시다 공업 주식회사(현재 회사명은 YKK)가 일본흥업은행에서 1200만엔을 융자받아
미국에서 체인머신을 4대 들여옴으로서 생산했다.
그러나 증언이 해를 거듭함에 따라 그 정도가 과격해짐으로써 겪은 사건의 성질이 완전히 달라지는 경우까지 있음은 분명 사실이다. 예를 들어 피해자 증언 중에서는 초기에는 '일본인 남성의 돈을 벌 수 있다는 회유에 넘어가 (위안부에) 가게 되었다'[15] 는 형태를 띈 것이 이후 십수년을 지나면서 '경찰이 집 안까지 들어와 강제로 나를 끌고 갔다' 는 증언으로 바뀐 실례가 분명히 존재하고 증언에서 언급된 일본군의 특성이 2차세계대전까지의 일본군의 특성과 맞지 않고 오히려 2차세계대전 당시부터 1980년대까지의 주한미군의 특성[16]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었다.[17] 이렇게 증언의 내용이 과격해지는 방향으로 변화하는 것은 관찰 가능하며 위안부 연구에서 증언의 객관성을 의심해야 하는 한 가지 이유가 된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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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위키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에 대한 한계" 목록
http://naver.me/xRMT6v9J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으면 위안부 증언에 대한 검증 블로그로
그리고 정대협 주최의 시위에서 가장 앞장서서 열렬히 활동하는 이용수라는 할머니.
연세가 벌써 93살인데 연세에 비해 너무 정정하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
목소리도 쩌렁쩌렁한데다 위안부 시위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 전국을 바쁘게도 돌아다닌다.
과연 93살이 맞는지 의문스러워진다.
노무현 정권때는 반미단체와 함께 이라크 파병 반대시위에도 참가하고
이명박 시절에는 민주당의 국회의원 비례대표로 출마하기도 했고
최근엔 성주에 와서 사드반대 반미시위에도 참가해 마이크를 잡고 열변을 토하셨다.
웃긴건 그렇게 반미시위를 하면서 열변을 토할땐 언제고 트럼프 만찬장에 문재인이 초청하니
트럼프를 보자마자 손을 활짝 벌려 껴안으려 하고 있음.
트럼프는 처음 황당해 하다가 마지못해 껴안아 주는 모습을 보여주기도하고.
도대체 이 할머니 정체가 뭐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http://www.godemn.com/xe/index.php?document_srl=539490&l=ko&mid=free_board
그 외에는 이용수 할매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나와있는 사이트를 보기를...
그리고 우리나라 최고의 무소불위 권력을 가진 "정대협"에 대해서도 수상하다.
정대협의 대표가 수많은 종북단체들과 반국가사범들과 끈끈하게 연관이 되어 있다는 것은 이미 다 알려진 사실
그러다 보니 정대협이 지금까지 저질러온 전적도 화려하다
북괴 돼지 김정일이 죽었을 때 "서거"라고 표현
김정일 죽은 것에 대해서 정대협 차원에서 조전을 보내겠다고 함.
일본인의 조상들이 조선인들을 괴롭혔다고 일본이 유무상 전부 합쳐 65년 당시 일본 외환보유고의 절반을 보상금으로 주고 그후 수십번 사죄를 해도 일본과 함께하는 미래는 없다고 그렇게 난리를 치면서도,
한국인 수백만명이 희생당한 625 전쟁을 일으키고 사과 한마디 없고 지금 현재도 꾸준히 무력도발을 하며 많은 장병의 생명을 앗아가는 625 전범의 통치권력을 그대로 계승한 아들과 손자에게는 어떻게 이렇게 관대할 수가 있지?
일본이 해방이후 북한이 해왔듯이 그렇게 무력도발하며 우리 군인들을 죽이기라도 했나?
일본에 가서 조총련과 접촉해 뭔가 꿍꿍이를 저지르기도 하고
헬리콥터와(?) 지프차(?)를 타고 일본군 위안소로 끌려가
크리스마스 휴가때(?)
지퍼(?)달린 군복을 입은 일본군인(?)에게 성적 학대를 당했다는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증언을 한 김복순 할매를 앞세워
조총련 파이팅 조선학교 파이팅 응원도 함
덧붙여서
헬리콥터 보유 : 미군(O) 일본군 (X)
군대 지프차 보유 : 미군(O) 일본군(X)
군대 크리스마스 휴가 : 미군(O) 일본군 (X)
지퍼달린 군복바지 : 미군(O) 일본군(X)
몇번을 생각해보지만 진짜로 저 할머니 일본군 위안부가 맞으신지 의심스러움...
북한산 송화가루를 수입해 판매하는가 하면
한창 천안함과 연평도 포격으로 대북감정이 안좋을 시기에
뜬금없이 남북이 연대해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라 하고
북한에 대한 쌀 퍼주기 지원을 정부에 요구하기도 함
이렇게 전적이 화려하니 국정원이 가만 있겠나?
국보법으로 영장 발부와 이메일 압수수색도 함.
물론 당시 야당이나 시민단체, 빡대가리 개돼지들은
합법적인 법적 조치와 수색을 두고
친일정부의 친일 만행이라고 입에 거품물고 항의했지.
그나저나 이런 활동들을 무슨 돈으로 하고 있을까?
물론 가장 큰 도움은 정부의 지원이 아닐까 한다.
정대협도 엄연한 시민단체이고
참여연대와 마찬가지로 정부의 시민단체지원법에 따라
막대한 세금이 이 단체로 지원되고 있음.
그리고
매달 이 많은 사람들(흑우)이
열심히 갖다 바치니
무려 한달에 2천만원이 넘는 거금이 들어온다.
이런게 창조경제인가?ㅋㅋㅋ
하긴 이런 돈이 들어오니
한일 위안부 협정 같이
완벽 무결하게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극도로 싫겠지
완전 해결되면 지들은 그날부로 돈줄이 말라버리니...
그리고
위안부와 관련해 또 사업을 벌린게 "소녀상 네트워크" 사업인데
유명한 조각상을 시작으로 기념주화 발행이니 촛불, 리본, 여러 이벤트 등등
국가나 법의 간섭을 전혀 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반 시민단체는 물론이고 웬만한 대기업들도 이렇게 사업을 하려면
세금문제부터 시작해 서류에서
자금으로 일일히 무엇을 했는지 자세히 기재한 내역서까지 준비할 것이 한두개가 아닌데
지원된 세금이나 기부받은 돈들이 도대체 어디에 사용되었고
효율적으로 사용되었는지 하나도 공개된게 없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대한민국 최고의 성역이지.
그냥 사이트 만들어서 팔고 다 팔리면 그냥 폐쇄하고 없애면 그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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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족을 붙이자면
위안부 20만명 설의 출처에 대해서 대충 설명하겠는데
이 글을 읽는 사람들도 알다시피 정신대와 위안부는 다르다는거.
정신대 : 군으로 공급되는 군복, 기계, 각종 부재품들을 생산하는 말하자면 여공들, 혹은 군에 잇으면서 빨래나 조리를 담당하던 여성들, 혹은 부녀자들.
여학교의 우수생들을 각출하여 보내졌고 주로 당시 군부에서 권장한 몸빼바지를 입고 활동했고 월급도 넉넉히 받았으나
전쟁 말기에는 군표나 채권으로 받기도 하거나 그것도 못받았을때도 있었던게 사실.
위안부는 말 그대로 군부대를 따라다니며 군인들의 성욕을 풀어주는 위안부로서 위안소는 어디까지나 민간 업자들이 운영하고 있었음.
참고로 위안부는 정신대의 각출과는 달리 광고를 통한 대대적 모집이나 기존의 사창가의 포주들에게서 지원을 받았고
당시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수많은 나라들에게서 위안부 여성을 모집 받았고
당연히 조선에서 온 조선 여성들 위안부로 들어왔다.
물론 그 중에는 자발적으로 온 여성도 , 사기에 걸려 속아 들어온 여성, 인신매매범에게 납치당해 팔린 여성들도 있었겠지...
조선인 여성의 위안소는 대부분 민간업자들이 모집과 영업을 담당했고 이 역시 조선인들이 담당했음.
보이는가? 저 많은 조선인 위안소 영업자들의 이름이.
이들이 위안소를 운영하며 일본군에게 돈을 받으며 부를 얻었던 것임.
여성들을 모으기 위한 모집도 납치도 사기도 모두 이들의 손으로 행해진 것임.
일본군이 갑자기 방안까지 쳐들어와 여성들을 붙잡고 데려갔다? 글쎄...
다시 20만명설로 돌아가자면
정대협은 원래 위안부가 아니라 정신대 여성들을 위해 출범한 단체로
오래전 일제시대 남자들이 군이나 광산등등으로 징용당해서 전쟁에서 갑작스럽게 패망하고 월급을 제대로 못받고 체불 당한 것에 대해서
일본에 손해배상을 청구하려고 했는데
이에 정신대에서 일하던 근로 여성들도 전쟁 막판에 임금 체불자들이 많았기에 이들을 위한 단체로 출범한 것임.
위에서도 말했듯이 군사물자 생산이나 군대 잡부 등등으로 동원된 여성들이
전쟁 패망 당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임금 체불 피해자를 추산해서 20만명 정도라는 계산이 나온게
이 위안부 20만명설의 시초가 되겠음.
그리고 용어를 정확히 하자면 정신대는 (남성 징용공이 아닌) 여성 노동 징용공들이지 군부대집창촌에서 일하던 위안부와는 다른 것임.
해방이후 반세기 가까이 잠잠하다가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이후 갑자기 너도나도 강제로 끌려갔다는 식의 증언들이 터져나오기 시작한 것.
그런데 당시 일제는 전시경제 체제로 적절한 인플레이션을 감안하고 화폐를 찍어내며 효율적인 성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전시에 동원된 기업들과 민간에 돈을 매우 잘 지급하고 있었음. 일본 본토 대비로도 나쁘지 않은 가격에 조선쌀(조금씩 개선되지만 초반엔 도정 등 품질 차이남)을 사간 것도 그중 한 예임.
조선에 개량품종을 들여온 것이 생산량 증가에 기여한 측면도 있지만 민중사학자들이 주장하는 현실과는 거리가 먼 쌀수탈론과 달리 조선의 쌀을 돈을 주고 수입함으로써 조선의 쌀생산량이 비약적으로 증가함. 조금만 생각해봐도 댓가를 지불하지 않는데 매년 생산량을 늘리는 바보는 없음. 당시 사료나 신문 기록으로도 쌀거래 수출입가격과 쌀선물거래의 증거가 넘쳐남.
조선인들은 쌀을 팔고 그걸로 더 많은 양의 잡곡과 생필품을 구입하는게 가능해짐. 일부 사람들은 일제가 쌀을 수입해서 나중에는 조선의 쌀값이 일본 쌀값과 거의 비슷해지는 바람에 조선의 서민들이 사치품인 쌀을 못 먹게 된게 수탈이라는데 판단은 각자 알아서.
전쟁터에서 군인들에 의해 민간인들에 대한 전쟁 강간이 발생할 수는 있음.
하지만 일제에 동화작업 중이던 식민지들에서 모집한 위안부는 그런게 아님.
당시에 일제는 식민지에서의 위안부를 지면으로도 모집했고, 그때 시세로 엄청난 돈을 벌었기에 지원자도 많았음.
일제에 동화시키던 식민지에서 지원자도 많은데 민중사학자들 주장처럼 식민지 주민들의 반감을 사려고 굳이 일제가 끌고갈 이유도 없고,
상식적으로 그런 일이 있었다면 일본군인이 끌고가다가 가족들과 혈투를 벌이고 그런 기록이라도 있어야 되는데 없음.
말 그대로 90년대 초까지 잠잠했던 일임.
1938년부터 있었던 육군특별지원병 제도는 세계식민지사에 없었던 제도인데 식민지내에서 군을 양성하는 제도 즉, 장교, 하사관을 조선에서 뽑았음. 정치적으로 황군화 목적도 있었지만 1938년-1943년간 1만6천여명 모집에 80만명이 넘는 조선인들이 지원했었음.
리콴유가 이런 말도 함.
"내가 처음 본 한국 사람들은 일본 군복을 입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한국인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 한국인들은 일본군이 싱가포르를 점령할 당시 이끌고 온 두 외인부대 중 하나였으며, 다른 외인부대는 타이완인들로 구성됐었다. 일본군을 돕고 있던 한국인들은 몹시 거칠게 행동했고, 일본 군인들만큼이나 고압적인 태도를 보였다."
2차 대전 후 전범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조선인은 148명이었음.
그리고 해방이후에는 과연 위안부가 없었나?
어쨌든 80년대 아사히 신문의 위안부 피해자 폭로 기사의 근거를 마련해준
요시다 세이지의 취재로 위안부에 대한 피해 사실이 수면위로 올라옴으로서
정대협이 거기에 꼽사리 끼고자 덤벼들면서
어떻게 20만명이란 숫자가 위안부의 숫자가 되 버린 것임.
참고로 요시다 세이지는 천황제 폐지와 사회주의를 외치던 전형적
좌파 언론인으로
일본군이 제주도에서 여성들을 강제 납치해 끌고가 위안부로 만들었다는 취재 책을 써냈는데
(최근 일본에서 이것과 아사히 가지의 기사가 근거없는 소리로 드러나 일본 우익들이 아사히 신문을 맹공격하는 먹잇감이 되었음)
이게 1989년 제주신문에서 "그런일은 없엇다" 라고 밝혔음. (위에 제주신문 짤방)
그리고 최근 일본 방송의 제주 취재에서도 제주 주민들은
제주에서 일본군이 여성들을 강제로 끌고 간 사실이 있냐는 질문에
응. 아냐. 그런일은 없어...
요즘처럼 깡패국가 중국이 날뛰고 있고 북핵문제로 냉랭한 시기
미국은 일본, 호주, 인도, 동남아국가들과 함께 반 중국 연대를 구성하며 중국을 압박하고
한국 또한 중국, 러시아, 북한과 같은 레드 진영이 아닌 미국, 일본, 호주와 같은태평양 세력의 일원으로
한미일 군사동맹이 중요한 이때에
언제까지 지나간 과거사 (특히 위안부) 문제로 현실과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앞날을 저당잡혀서야 되겠는지 말이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3/23/2015032300257.html?Dep0=twitter&d=2015032300257
오죽하면 미국 정가에서 "한국 피로증"이란게 생겼다고 하겠음?
마지막으로 반일 종족주의 책의 서문을 올리며 이 글을 마치겠음.